돈 없이 무슨 수선을 해?/곤허의 역사/알레고리와 해석
곤허의 세 시대를 가로지르는 구조와, 작품 바깥과 대조하는 여러 독해를 함께 정리한다. 개별 사건의 내용은 세 시대 문서에서 다룬다.
이 문서의 성격
스포일러 경고 — 이 문서는 제716~825장의 내용을 전제로 하며, 곤허의 성립 과정과 정마대전의 결말을 포함한 작품 전반의 정보를 다룬다.
아래에 정리하는 것은 전부 작품 텍스트에 근거한 해석이며, 작가가 확정한 의도가 아니다. 작가는 이 작품의 어떤 대목에 대해서도 무엇을 빗댄 것인지 밝힌 적이 없다. 그래서 이 문서는 어떤 해석도 사실로 단정하지 않고, 성립 가능한 독해와 그 근거, 그리고 그 독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란히 싣는다.
한 가지를 미리 밝혀 둔다. 이 작품의 텍스트는 어느 한쪽 해석으로 확정되지 않도록 쓰여 있다. 정과 마의 배역은 국면마다 바뀌고, 가장 체제 비판적인 발언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에게 주어지며, 작중 명제 자체가 "정과 마의 구분은 마음과 승패에 달렸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미결정 상태를 작가의 회피로 볼 수도 있고, 그 자체가 이 작품의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문서는 후자를 하나의 관점으로 유지하되, 어느 쪽도 확정하지 않는다.
개별 사건의 경위와 인물의 선택은 여기서 다시 서술하지 않는다. 황우대성의 기억, 기억몽경, 신세계 계획 세 문서를 참조한다.
세 시간층
곤허의 역사를 다루는 세 문서는 작중 공개 순서와 다른 순서로 쌓인다. 셋을 시대순으로 놓으면 하나의 계단이 된다.
| 층 | 문서 | 다루는 국면 | 그 층에서 사람이 놓이는 자리 |
|---|---|---|---|
바닥층 | 세계를 층으로 나누고 도통을 세우던 건설기 | 세계 개조에 동원되는 노동, 도태되면 사료 | |
중간층 | 세워진 질서를 두고 벌어진 정마대전과 개혁 | 어떻게 이용할지를 두고 다투는 인구 자원 | |
상층 | 완성된 질서와 그것을 뒤엎으려는 최종 계획 | 청산하고 다시 배치할 수 있는 자산 |
세 층이 이어지는 방식은 반복이 아니라 갱신에 가깝다고 읽을 수 있다. 바닥층에서 만들어진 것이 중간층의 전제가 되고, 중간층에서 흡수된 기술이 상층의 산업이 된다. 황우들의 저항을 태워 만든 영혼연계는 뒤에 영계가 되고, 정마대전에서 정도가 사들인 인조 혈육 공급망은 현재 곤허의 혼수 산업 안에 남는다. 각 층의 승자가 다음 층의 조건을 물려주는 구조다.
이 계단을 위에서 아래로 읽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장우가 정보를 얻는 순서는 상층 → 바닥층 → 중간층이며, 뒤로 갈수록 적의 규모가 커지는 대신 당면한 싸움은 작아진다. 정기맹을 이겨도 천정이 돌아오고, 천정을 밀어내도 도통이 남는다는 배치로 읽을 수 있다.
우마가 쓴 이야기
이 작품을 읽을 때 가장 자주 나오는 물음은 작가가 무엇을 빗대고 있느냐다. 그런데 작품 바깥에서 확인되는 사실 하나가 그 물음의 자리를 옮긴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매일 연재하면서, 회차 제목 자체에 독자에게 표와 후원을 청하는 말을 적어 넣는다.
전체 943개 회차 제목 가운데 후원에 감사하는 말이 붙은 것이 106개, 맹주 후원을 밝힌 것이 115개, 월표를 청하는 것이 63개다. 제목의 4분의 1 이상이 본편 내용이 아니라 연재 사정을 담고 있다. 그중 여러 편은 월표를 받은 만큼을 갚는다는 뜻으로 월표 빚 갚기라고 번호를 매긴다. 사람을 채무로 묶는 세계를 그리는 작가가, 자기 노동을 독자에게 진 빚으로 세어 가며 그 세계를 쓰고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을 놓고 두 가지 독해가 가능하다. 하나는 연재 소설의 흔한 관행일 뿐이며 작품 해석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의 비판이 바깥에서 안을 내려다보는 자리가 아니라 같은 조건 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뒤쪽 독해를 택하면 작가를 위험을 무릅쓰고 우화를 쓰는 지사로 박제하는 읽기가 오히려 작품에서 멀어진다. 이 작품이 반복해 그리는 것은 영웅적으로 저항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계속 일하면서 그 자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황우대성의 이름에 든 소, 이 작품이 그리는 노동, 그리고 매일 갱신을 채우며 표를 청하는 작가는 같은 조건을 공유한다. 중국어 인터넷에서 임금 노동자가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 마소(牛馬)라는 점까지 겹쳐 읽으면, 비판의 출처가 곧 비판의 대상 안이라는 구도가 된다.
작품이 끝내 어느 진영도 승자로 만들지 않는 것도 이 구도와 어울린다. 바깥에 선 사람은 심판을 내릴 수 있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럴 자리가 없다.
작가의 서술 전략
가장 위험한 발언이 어디에 놓이는지를 따라가면 다섯 가지 배치가 반복된다. 이것을 검열 환경에서 발화하기 위한 장치로 읽는 독해가 있고, 판단을 독자에게 넘기기 위한 형식으로 읽는 독해가 있다. 둘은 배타적이지 않다.
| 전략 | 작동 방식 | 작중 사례 |
|---|---|---|
불신할 수 있는 기억 | 첫 몽경에서 "기억은 왜곡된다"를 규칙으로 선언해 두고, 이후의 모든 발언을 한 인물의 편향된 회고 안에 넣는다 | 능풍 몽경의 자기 미화, 영신천의 전언으로만 확정되는 진상 |
패배해 죽는 자의 입 |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이야기 안에서 지고 죽는 인물이나 마(魔)로 분류된 존재에게 준다 | 소사숙의 반대, 천마태자의 항변, 끊긴 채 남는 황우대성의 봉기 |
단독 악인으로의 국지화 | 구조가 만든 결과를 한 사람의 비밀 범행으로 좁혀, 제도 자체는 손대지 않은 채로 남긴다 | 운태진이 마심을 혼자 지겠다고 선언하고 사후 귀속까지 설계하는 대목 |
익명의 음모 | 전쟁의 기원을 이념이나 구조가 아니라 끝내 밝혀지지 않는 배후에게 돌린다 | 기몽운을 도화선으로 쓴 미상의 조종자, 천공을 깨뜨린 미상의 힘 |
의도적 가역성 | 정과 마의 구분이 승패와 마음과 시점의 문제라고 작중이 스스로 명시해, 어떤 고정 대응도 텍스트가 반박하게 만든다 | 장문의 "후세는 패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영운요 편의 인상 역전 |
다섯 가지가 한 방향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같은 장치가 반대 방향의 독해도 함께 연다. 황이 편의 공동체가 식인으로 뒤집힐 때, 그것을 집단이 구성원을 소모한 역사로 읽을 수도 있고 먹힌 자들조차 후회하지 않았다는 서술을 근거로 실제 해방이었다고 읽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 텍스트는 확정하지 않으며, 첫 몽경에서 깔아 둔 기억 왜곡 규칙이 양쪽 모두에 물러설 자리를 준다.
이 배치가 이야기 안에서 실제로 하는 일도 있다. 장우가 여봉의 몽경에 함몰되지 않은 이유로 작중이 드는 것은 그의 뇌리에 서로 다른 의념이 여럿 있어 제3자 시점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단일한 서술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관점이 복수여야 한다는 명제가 작품의 형식과 겹친다고 읽을 수 있다.
작품 바깥과의 대조
이 구간의 어휘와 도상은 현실의 특정 담론과 겹친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다만 겹침의 강도가 항목마다 다르므로 아래에서는 근거의 성격을 함께 적는다.
어휘가 직접 겹치는 것
- 요예들의 의식 밑바닥에 새겨진 철칙 "전심전력으로 인류를 위해 봉사하렴"은 널리 알려진 정치 구호의 문형을 그대로 따른다. 그 구호가 해방의 말이 아니라 복종 프로그램의 문면으로 쓰이고, 결말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우렴"으로 몇 단어만 바뀌어 속박이 풀린다는 점에서, 구호의 힘이 문장이 아니라 그 수혜자를 누구로 정하느냐에 있다는 독해가 가능하다.
- 황우대성의 기억에 나오는 '숙청'과 '정리', 신세계 계획의 '대청소'는 선협 세계에 필요하지 않은 정치 캠페인의 관료 어휘다. 특히 대청소는 20세기의 대규모 숙청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와 같은 말이다.
- 선인의 비료론에 나오는 '우열을 가려 도태시킨다'는 사회진화론 계열의 표준 어휘이며, 대를 이어 골라낸다는 발상은 우생 담론의 문형과 겹친다.
- 천마종의 모집 구호 '유교무류(有敎無類)'는 공자의 말이고, 식인 이미지는 루쉰 《광인일기》의 계보에 놓인다. 가장 위험한 이미지가 가장 정전에 가까운 인용 위에 서 있다는 독해가 가능하다.
- '대성(大聖)'은 《서유기》 제천대성의 계보이며, 하늘의 질서에 반역한 요괴 성자라는 틀을 가져온다. 다만 그 주체가 노동하는 소로 바뀌었다는 점은 황우대성의 기억에서 다룬다.
구조가 겹치지만 일대일 대응은 어려운 것
- 산을 옮기고 강줄기를 당겨 청사진대로 세계를 개조하는 대규모 동원 노동, 그 와중에 도태된 자들이 식량이 되는 배치는 20세기의 여러 집단 동원과 그 귀결을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다만 특정 연도의 특정 운동에 못 박을 근거는 텍스트에 없다.
- 마도정용과 이마제마는 적대 진영의 기술을 자기 이념의 통제 아래 도입한다는 조어이며, 시장 기술을 다른 이름 아래 받아들인 개혁기의 정치 언어와 구조가 같다는 독해가 가능하다. 이 대응은 기억몽경의 해설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 여섯 살·열두 살·열여덟 살 세 번의 자질 측정으로 평생이 정해진다는 설정은 진학 관문이 신분으로 굳는 사회의 수치화로 읽을 수 있다. 소를 뜻하는 이름을 노동자의 자칭으로 쓰는 당대의 어법과 겹친다는 지적도 있다.
- 고지능 기령이 인력을 대체한 뒤 남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현재 시점의 구상은, 자동화가 노동을 불필요하게 만든 뒤의 잉여 인구 문제와 겹친다. 창세기에 노동이 필요해 만들어진 집단 생명체가 노동이 불필요해진 시대에 다시 설계된다는 순환으로 읽을 수 있다.
근거가 약해 삼가야 하는 대응
- 황우들을 짓밟는 선인이나 제1요성을 특정 실존 인물에 대응시키는 독해. 텍스트는 이들을 익명의 복수(複數) — "선인들", "종문들" — 로만 제시한다.
- 특정 사건의 연도나 명칭에 작중 사건을 못 박는 독해. 작중은 시대 표지를 의도적으로 지워 두었고, 그 지움 자체를 반복되는 패턴이라는 주장으로 읽는 쪽이 텍스트에 가깝다.
- 이 작품의 창세 신화를 봉기 찬가로만 읽는 독해. 작중은 구세 신앙이 절망한 사람들의 죽음을 앞당기는 대목과 "너도 다 잡아먹지 않았느냐"는 반문을 지우지 않는다.
"모두가 패배자, 시스템만이 승자"
세 층을 통과한 뒤 남는 판결을 한 문장으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이 문장은 작중 인물의 입에서도 거의 그대로 나온다. 천마태자의 진령은 천마종도 이기지 못했고 만법종도 진 것 같으며 영신천 역시 패배자였다고 말하고, 황우대성은 무엇을 시도해도 세계가 결국 선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되돌아왔다고 말한다.
이 판결이 특정 진영을 지목하지 않는다는 점을 두고 두 방향의 독해가 가능하다.
한쪽은 이것을 정밀한 균형으로 읽는다. 혁명 쪽을 미화하지 않고 건설기 쪽을 단순히 매도하지도 않으면서, 이상이 배반당하고 기계만 남았다는 진단은 그대로 살린다는 것이다. 표적이 정도냐 마도냐를 넘어 위계를 세운 창건자 전체로 올라가면서, 오히려 특정 진영이나 사건으로 환원되지 않는 형태에 도달한다는 독해다.
다른 한쪽은 이것을 판단의 유예로 읽는다. 모두가 패배자라는 결론은 누구의 책임도 특정하지 않으며, 남는 것은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체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만 작중이 이 체념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영신천의 전언은 이번 세대가 못 고치면 다음 세대가 고친다는 것이고, 황우대성의 유언은 도통을 찾으라는 것이며, 장우의 답은 함께 틀리겠다는 것이다. 세 문장 모두 결론이 아니라 인계에 해당한다.
반대 독해 — 보편 우화로 읽기
위의 대조를 전부 물리치는 입장이 성립한다. 이 작품이 특정 국가의 현대사를 빗댄 것이 아니라 권력과 자원과 평등 일반에 대한 보편 우화이며, 현대사 매핑은 독자가 자기 배경 지식을 투사한 결과라는 입장이다.
이 입장의 근거도 텍스트 안에 있다.
- 제800장 이전의 곤허는 어느 사회의 독자든 자기 사회를 대입할 수 있는 자본주의 풍자로 읽혀 왔고, 세 시대 문서가 다루는 구간도 그 연장선에서 읽을 수 있다. 영근 시장, 학력 위계, 임금과 대출, 잔업과 실적은 특정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 작중이 반복해서 명시하는 것은 정과 마의 구분이 본질이 아니라는 명제이고, 이 명제는 어떤 고정 대응도 성립하지 못하게 만든다. 특정 진영을 지목하려면 독자가 먼저 그 대응을 인정해야 한다.
- 어휘의 겹침 가운데 상당수는 한자문화권의 고전 어휘이거나 근대 이후 널리 퍼진 담론의 용어다. 우열 도태나 인구 자원 같은 말은 한 나라의 전유물이 아니다.
- 세 층의 구조 — 건설기의 폭력, 그 위의 노선 갈등, 완성된 질서와 그것을 뒤엎으려는 시도 — 는 여러 사회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순서이며, 그 반복 가능성 자체가 이 작품의 주제라는 독해가 가능하다.
두 독해가 양립할 수 있다는 관점도 있다. 텍스트가 어느 쪽으로도 확정되지 않게 쓰였다는 사실 자체를 두 독해를 모두 열어 두려는 설계로 보는 것이다. 이 관점을 따르면 어느 한쪽을 골라 확정하는 일이 오히려 작품의 구조를 깨뜨린다. 이 문서가 어떤 해석도 사실로 단정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